어제 모임에 갈 때 들고갔다가 족발집에 두고 나왔다. 전에 서강대 앞에서 모였을 때도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를 들고 갔다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을, 자상한 물뚝대장이 챙겨온 적이 있다. 그 책은 다른 책을 살 때 껴서 온 책이라서이기도 하지만, 잃어버려도 그렇게 아깝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은 아깝다. 다시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 중이다.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심한 상실감을 느끼는 것이 보통일텐데, 나는 용케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초연한 편이다. 그 전에는 없던 눈밑 주름이 눈썹연필로 그어놓은 것처럼 짙게 드리워졌다던가, 원래도 듬성듬성한 머리숯이 요즘 들어 더 쾡해졌다던가 하는 것을 발견할 때,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고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는, 또한 당연히 올 것이라고 익히 예상하고 있었던 청구서나 고지서를 받아든 것처럼 그저 담담할 뿐이다.
나는 내 나이에 걸맞는 삶을 사는 데 관심이 있을 뿐, 나에서 빠져나가버리는 것들, 잃어버리고 사라진 것들, 혹은 그런 과정에 있는 것들에 대해 집착하여 안타까와 하거나 우울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서 사라진 것들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젊은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러움'이라는 심리상태조차 내가 늙어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래서 담담하게 받아들여 마땅한 하나의 증표이다.
그러나 이 책의 한 구절을 보고는 그런 부러움조차 홀가분하게 훌훌 털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지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독거렸다."
<그 남자네 집>
주인공이 우연히 어릴 때부터 살았던 동네를 찾아가 같은 동네에 살던 옛 애인과의 추억을 되밟아 가던 중에, 커피숍에 앉아 자신이 그 커피숍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동떨어져있다는 뻘쭘함 속에서 건너편에 앉아 짙은 애무를 나누고 있는 젊은 커플을 보고 내뱉는 독백이다.
그래, 내가 도저히 가질 수도 누릴 수도 없는 것에 대해 가지는 부러움은 의미없는 것이다. 설사 내가 재주좋게 아주 나이어린 여자를 차지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젊을 때 젊은 여자와 나누는 사랑과는 도저히 같을 수 없다. 그것은 부러워할 일이 아니라, 박지성이 축구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처럼 즐거워하고 흐뭇해 할 일이다.
<김선규, www.ufokim.com>
노년의 상징은 상실이다. 하루 종일 걸어도 끄떡없던 튼튼한 다리도 잃어버리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창창한 미래도 사라지고 없으며, 부모의 존재 없이는 하루도 살기 어려운 자식들에게 느끼는 권력감도 소멸되고 만다.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할 수 없는 게 훨씬 많고, 지하철을 거꾸로 타는 것과 같은 작고 흔한 실수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다가오며, 옛날 드넓었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시골집 텃밭 만큼이나 작아보이는 것처럼 대단하다 싶어 움켜쥐고 있는 것들은 날이 갈수록 왜소해지기만 한다.
이런 상실은 사실 무척 두렵다. 그러나 두렵다고 해서 피해갈 수도 없다. 쌈빡하게 60까지만 살고 가겠다고 다짐을 하더라도, 그 다짐을 정상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게다가 사람들의 수명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간다.
상실과 친해져야 한다. 박완서가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다양한 노년의 삶은 상실과 싸우다가 결국 상실과 화해하고 정겹게 벗하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다.
나는 원래 이런 상실과 친하다. 워낙 자랑할 것이 없는지라 양쪽 시력이 2.0인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던 나는 사람들 있는 데서 돋보기안경을 쓰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었다. 그런데 이제는 자연스럽다 못해 돋보기를 쓰고 눈을 아래로 내려깐 채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 원숙해 보이는데다가 우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노년의 삶이 기다려지고 기대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미 상실과 친해져 있는 까닭에 다가올 노년이 두렵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 책에 있는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나보다 먼저 살아간 어른들이라기보다 벌써 앞질러 먼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야 할 그런 친구.
코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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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커플... 나상실 양이 생각 나는군효...
2007/12/07 00:36-연예가깽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