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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내가 있는 삽화 - 4

시리즈 2007/12/06 22:50 by 알밥






그와 내가 있는 삽화 (4)  


미동초등학교 41회 동창회는 장미가 피어 만발한 5월에 시작하여.
녹음이 검푸르게 숲을 이루고 있는 남산에서
여름나기 단합대회를 가졌고,
은행잎이 노란비로 내리는 남한산성에서 단풍놀이도 했으며,
흰눈이 쌓인 그윽한 밤에 망년회를 열고,
47년 만에 이루어진 우리들의 재회를 자축했습니다.
그의 아낌없는 지원이, 이 모든 모임을 더할 수 없이
화려하고 풍성하게 하여 주었습니다.

"마치 동창회를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오신 분 같아요"
아직 오십대 초반인 그의 아내는 남편이 신이 나서 봉사하는 것이
너무도 기쁜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불쌍한 분이거든요.
그 분에게 즐거운 일 생긴 것이 저는 좋아요."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우리는 금기 사항 하나를 묵계로 만들었습니다.
본인이 밝히지 않는 한,
그리고 가까운 친구를 통해 알려지지 않는 한,
현재까지의 이력을 묻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냥 미동 41회 졸업생이면 되었습니다.

사실 육십이 넘은 나이에서 학력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재의 삶의 내용이 학력이지요.
공부를 하는 이유가,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자기 삶을 영유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이미 이웃과 가정과 사회에 유익이 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명문의 최고 학부 출신이라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래서 동창회 시작 때부터 6년이 되는 지금까지 나는
그의 학력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회장이 어디 나왔어?" 여학생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람을 잘 가르친 학교!"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앞눈이 어두운 내게, 지팡이처럼 내밀었던
그의 두둑한 손바닥에, 세월이 그리 많이 흘렀건만,
아직도 굳게 박혀 있는 굳은 살은,
내가 모르는 그의 젊은 날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럴 때 내 가슴에 젖은 바람 한자락이 불어 옵니다.

     어머니 안 계신 구남매의 집,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나 하고
     자나깨나 생각했지.
     전쟁이 끝난 폐허의 잿더미 위로 돈이 날아다니는 게 보였어.
     날아다니는 돈을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어.
     보이지를 않으면 속이 편할 텐데 말이야. 성질이 고약해지더군.
     만만한 게 아내라, 아내를 많이 볶았어.

그 시대의 가난했던 모든 가장들이 하던 식으로,
버는 것이 아니라 쓰지 않는 것으로 아내를 힘들게 하고,
그 힘들음을 알고도 냉정하게 외면하며,
목표를 이루어갔다고 했습니다.

     나는 차 한 잔을 아끼는데, 월급을 받으면,
     하루를 근사한 소풍으로 보내는 친구가 있었어.
     장가를 간다고 청첩을 했더군. 빈 봉투로 부주를 했지.
     20년 뒤였어, 그들 부부와 저녁을 먹으면서 봉투를 내밀었지.
     "니 결혼 축하금이다. 그 때 내가 부주했으면
      너는 낚시로 없앴을 거야. 부부가 일본이라도 다녀 와"

내가 그의 출신 학교를 대한민국 최고의 학교라고 치는 이유는
너무도 많았습니다.

     병 문안을 다녀 왔어. 옛날 직장 동료야.
     신부전증으로 생명이 위급해.
     이식 수술만이 살아날 길이라는데,
     젊었을 때 몽땅 탕진한 녀석이지,
     비용의 반을 내 놓을 테니,
     나머지는 자식 형제 친구들이 책임지라고 했어.
     정성의 문제니까 말야.

그러면서 정작 자기 몸은 심장으로 흐르는 혈관이
모두 기름 덩어리로 막혀. 겨우 실낱 같은 곳으로 피를 흐르게 하며,
연명을 하고 있는 딱한 사람!

     배고팠을 때를 생각하며 엄청 먹었다.
     아이구 맛 좋은 돼지 삼겹살, 정말 엄청 먹었어.
     어느 날 산행에서 극심한 가슴의 통증으로 혼절을 했지.
     심근경색이라는 것, 들어 봤어?

그런데 주치의는 또 다른 병증을 진단해 낸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연민이 아닌, 그의 혈관의 돌덩이를 녹여 내는
수천도의 우정을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화내고, 침묵하고, 엄청 먹어 생긴 병이라면,
기뻐하고, 떠들고, 엄청 굶으면, 낫는다고, 꼭 나을 수 있다고,  
그가 내게 지팡이처럼 그의 손을  내밀어 잡게 했듯이
나는 그의 손을, 나의 따뜻한 두 손으로 감싸 안았습니다.

--

(어머님 수필)




로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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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이 글은, 원저자의 동의하에, 별도로 편집,게재된 글입니다. 불법적인 펌글이나 스크랩이 절대 아님을 밝히는 바이오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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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닭's배달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두 분 다 참 따뜻하시네요.

    엄동설한에 저를 찌질넷에서 쫓아 내고도 발 쭉 뻗고 잘 자고 잘 먹는 냉혈광리자들도 있는데...

    2007/12/07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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