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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에서의 뉴타운 공약으로 논란이 있다. 개인의 이기적 몰욕에 의하여 투표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도 있다. 정치인의 욕심이 잉태한 거짓공약에 대한 비판도 당연해 보인다.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투표하고 어디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공동체적 연대의식과 도덕적 의무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공동체적 연대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항상 자신을 죽여서 대의를 먼저 생각하도록 강요받아서도 안된다. 모두가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다음에 가족을 위한다. 가족을 넘어 지역사회의 이익을 도모하기도 하며, 국익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있다.
 
이기적 개인이 점차 범위를 넓혀서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보통 리버럴리스트들은 자신의 욕구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단지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기적 자아에 갖혀서 살아가는 삶이 반드시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서로 협력하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에게도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오기도 한다.
 
때로 공동체의 이익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개인들이 모두 불행해지는 일도 일어날 수가 있다. 지나친 살신성인의 태도를 강조하다 보면 어느 덧 파시즘이나 나찌즘을 용인하는 폭력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개인의 불행을 강요하며 만들어낸 공동체의 이익이란 시초부터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이기적 욕구와 공동체의 이익은 적절한 선에서 절충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개인적 욕망이 혹시 가족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족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지역사회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지역사회의 이익을 추구하며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동안 지구촌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 것이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
 
우리는 비교적 잘 발달된 민주주의 제도 아래서 살고 있다. 이 것은 대단히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만큼의 수준이라도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나라는 그리 많지가 않다. 여전히 독재권력의 노예로 살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지구촌의 형제들이 있다. 아주 가까이는 우리의 동포인 북한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발전은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삼아 이룩된 것이다. 엄혹한 군사독재의 폭압에 저항하다 산화한 수많은 민주영령들이 있다. 투옥당하고 고문을 받은 많은 인사들이 있다. 눈에 보이는 고통은 아니라도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고 직업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리 큰 희생은 아니라도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운 수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3.15부정선거에 항거한 저항운동, 4.19 의거, 1979년의 부마항쟁, 1980년의 광주항쟁, 1987년의 6.10항쟁등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우리사회의 민주화 운동세력에 대한 국민의 각별한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을 먹고 지금의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성립한 것이다. 모두 고개숙여 감사해야할 일이다. 경제적으로 외환위기를 맞아 경제적 능력을 잃고, 가정을 잃고, 집을 잃은 많은 분들의 희생 또한 민주주의 발전에 토양이 됐다.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고, 참여정부가 탄생한 배경에는 민주화 과정에서 치른 희생에 대하여 국민이 사랑으로 보답한 결과였을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개인이 핍박받는 환경에서 좀 더 도덕적인 세력에게 힘을 모아주고 싶은 동기가 작용한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이 주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도덕적 동기가 작용해 왔다.
 
그런데 점차 민주화에 대한 포만감이 생겨나고 이제 공동체적 관점에 대한 집착도 약화되었다. 충분히 상류층에 속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기적 욕구를 잠시 접어두고 양심세력을 지지했던 화급함이 사라진 것이다. 점차 각기 자신의 이기적 욕망에 무게중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고학력의 지식인 계층이 독재정권을 외면하고 민주화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던 일은 강도가 약화되고 있다. 자신의 계급이익에 기반한 투표를 시작하였다.
 
공동체의 이익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으로 판단의 기준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저학력의 저소득층이 여전히 자신들의 이익에 대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식자층의 선동에 휘둘려 함께 기득권 옹호세력을 지지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점차 편들어줄 정치세력이 위축될 상황에서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선택을 하고 있다. 부자들이 잘되면 그것이 흘러 넘치고 자신들이 비집고 살아갈 길이 있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도 갖고 있다.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이기적 욕망이 작용하고 있다. 동등한 주권을 가지고도 약자들이 당하고 사는 이유일 것이다. 점차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은 잊혀지고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간다. 그나마 식자층은 오판이 적고, 사회적 약자층은 잘못된 정보에 홀린 오판이 많다.이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사라져간다. 포만감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경제적 욕망이 꿈틀댄다.
 
국익이냐 사익이냐?
 
대체적인 경향은 공동체 의식의 약화로 가고 있는 것같다. 국익보다는 지역사회의 이익을, 지역사회보다는 가족의 이익을, 가족 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더 높은 비중으로 고려하고 있다. 과거에 비하여 확실히 판단의 기준이 되는 포커스가 좁아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며 겪게되는 필연적 과정일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사고는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발전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공동체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일은 매우 희귀한 일이다. 그러나 항상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런 예들은 이미 우리의 정치구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다.
 
첫째, 지역주의의 폐해를 보자. 특히 심각한 영남과 호남의 지역주의는 국가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한다. 타지역에 대한 악감정을 표출하려는 욕구가 투표를 통해서 드러나고 거기에 기생하는 정치꾼들이 이익을 얻는다. 반면 그 것을 극복하려는 정치세력은 발붙일 틈이 없어진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사실 개인의 감정풀이를 추구하는 작은 이기심이 국가공동체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는 사례이다.
 
둘째, 지역개발 공약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지역에 지하철을 유치하겠다. 뉴타운을 건설하겠다. 이런 공약은 당신들의 집값을 올려서 욕구를 충족시켜 주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문제는 그러한 일들이 더 넓은 공동체의 이익과 상충한다는 점이다. 또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회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을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공약하는 것으로 엄연한 사기행위이다. 사기임을 알면서도 이기적 동기에서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소지역주의의 문제도 제법 심각하다.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전형적인 사례가 있다. 남해와 하동이 하나의 선거구였다. 남해는 남해출신 무소속후보가 압승, 하동은 하동출신의 한나라당 후보가 더 압도적 승리를 했다. 신안과 무안의 경우도 그렇다. 신안에서는 김홍업 후보가 압승, 무안에서는 다른 무소속 후보가 압승이다. 각기 연고에 다른 몰표의 결과였다. 개인의 단순한 연고의식에 기반한 투표였다. 공동체의 이익은 안중에 없다.
 
대체로 사익을 추구하면서도 크게 중요한 것을 취하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개인의 이익, 가족의 이익, 지역공동체의 이익, 국가의 이익, 지구촌의 이익을 순서별로 고려하는 것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더 큰 단위의 이익을 침해하면서까지 추구하는 것은 추하다. 그렇게 이기적으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는 공멸을 자초할 뿐이다.
 
사적 이익을 완전히 포기하고 국익만을 우선시하는 사고를 하자고 권할 생각은 없다. 그렇게 강요당하는 사회는 실현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해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구현할 길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하는 수준의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고도 양심에 꺼리낌이 없다면 이미 지구촌은 지옥에 다를 바가 없다. 최소한 공동체가 영위될 수 있는 수준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개인의 욕구를 추구하되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자기절제가 필요하다. 사익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뉴타운 공약에 환호하며 표를 찍은 사람들은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지역주의를 자극하는 자들에게 환호작약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침이라도 밷고 싶은 것이다. 내가 지금 추구하는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을 심각히 침해하는지를 생각하면 답은 이미 나와있는 것이다.
 
어떻게 독재자들의 후예와 민주화 세력을 투옥하고 고문하고 죽이던 사람들에게 표를 던진단 말인가? 민주화에 대한 포만감은 아직 때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민주주의에 목마르고, 공동체의 번영에 배고프다. 포만감을 느끼기에는 너무 열악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한 포만감이 혹시 공동체의 이익을 갉아먹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개발로 얻을 아파트의 시세차익이 우리후손들에게 물려줄 유일한 자산이어서는 안돼는 거 아니겠는가? 민주주의를 더 완성하고, 따스한 배려가 넘치는 자본주의를 완성하는 과제가 여전히 남아있다.

j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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