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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소방공무원을 마치고 농부로 돌아가서 돌아가실 때까지 농사를 지으셨던 아버님께서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마루에 앉아서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다.

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이 "비"라는 존재는 참 여러가지로 밀접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아버님께서 농사를 지으시던 논은 남양호 주변의 수로가 잘 정비된 현대식 논이었기 때문에 비가 안오면 벼들이 말라죽거나 하는 일은 없던 곳이었다. 그래도, 초창기만 해도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으면, 논 바닥 깊숙한 곳에서 염기가 우러나오는 뻘밭이었기도 했다.

정비된 수로조차도 양수장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위치적 불리함으로 인해, 남들이 논에 물을 다 채운 뒤에야 물이 졸졸졸 흘러 내려오는 제일 작은 수로에 연결된 탓에 한밤중에, 남들이 논 물꼬 막고 돌아간 뒤에 겨우 나가서 논에 물을 대고는 했던 기억도 난다. 심지어 방학중에 내려간 나도 별이 총총한 한 밤중에 모기향 몇개 들고 자전거 타고 사십분 걸리는 논까지 나가서 이슬 맞으며 물꼬를 지킨 기억도 있다.

그뿐이랴, 모내기 한 직후에 적절한 비가 내리는 것은 그야말로 제사라도 지내고 굿이라도 해서 기원하고 싶을 만큼 좋은 일이었고, 소나기가 잦은 여름에 점착제 섞어서 농약을 치고 나서 몇시간 안되어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를 보고 농약값 다 날렸다고 한숨을 쉬던 아버지의 모습도 자주 기억난다.

그때만 해도 어렸던 나는 비라도 오면 농사일 안해도 된다고 좋아하곤 했었는데 장마철 도대체 그치지 않는 비를 바라보면서 아직 덜 자란 벼들에 비해 불쑥 웃자라는 잡초들을 못 뽑아서 비료 다 빨아 먹는다고 아까와 하시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저 멀리 농막까지 무조건 뛰어가라고 외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놀라서 후닥닥 달려서 농막에 도착하자 마자 열대성 스콜 수준으로 쏟아져 내리던 비도 기억이 난다. 나보고는 그 비 맞지 말라고 농막으로 뛰어가라 해 놓고 얇은 옷차림에 그 비를 온통 다 맞으면서 농기구들을 정리하고 웃으면서 걸어오시던 모습도 기억이 난다. 내 눈에도 시원~ 하다는 말과는 달리 파랗게 질린 아버지의 입술이 보였던 기억도 난다.

비가 내리는 것은 농부에게 축복이기도 하고 재앙이기도 하다.

남 양호라는 간척지가 의미하는대로 방조제가 막고 있는 저수지의 특성상 비가 많이 내려 수위가 올라가도 썰물때가 되기 전에는 물을 방류할 수가 없다. 그 결과 불운한 타이밍에 장대비가 내려 버리면 저수지의 수위가 올라가고, 간척지 제일 끄트머리에 있던 우리집 논은 여차하면 배수로를 타고 역류한 물에 잠기곤 했었다. 사람 허벅지에 올 정도로 자란 벼들이 끄트머리만 물위로 겨우 내놓고 흙탕물에 잠겨 있는 모습은 농부에게는 더 이상 잔인할 수 없는 광경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삭이 패일 무렵에 태풍이라도 올라치면, 벼들 다 쓰러진다고 안절부절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서 돌아가신지 십년이 훨씬 넘은 지금에도 방송에 태풍 관련 얘기 나오면 벼 쓰러지겠네~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 비가..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창문 밖으로 아주 장하게 오고 있다.



비님이 참 장하게 오시는구나...




물뚝심송@찌질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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