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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문학 2008/09/11 10:32 by 알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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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미르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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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와 마르케스/네루다와 마르케스


북리뷰에 글이 너무 안올라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포켓 알바가 작품보다는 그 작품을 쓴 한 인간에 대한 생각을 옮겨 놓는다. 그 대상은 동 알바가 몹시 좋아하는 소설가, 한국에서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콜롬비아 태생의 가르시아 마르케스다. 사실 그는 독일의 귄터 그라스와 함께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가다.
 
이 글은 찌질넷 독자들을 생각해서 쓴 글이 아니라 어딘가에 썼던 글 중에 필요한 몇몇 Chapter만 짤라와 편집한 글이다. 가필은 문맥상 빼고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도 읽는 분 중에는 생경하다고 느낄 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우선 알밥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이 마당에 귀찮기도 하고 새롭게 글 쓸 여력도 없다. 이해바란다.
 
다만 우리 동시대에 이런 작가도 있었다. 이 사람 뭔가 흥미로운데... 혹시 이 사람이 쓴 작품들도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독자들의 호기심 유발 차원에서 올린다. 그 나머지는 모두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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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출신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1981년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인해 단번에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스웨덴 한림원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속에 보이는 “독창적이고 무한한 활력”을 노벨문학상 선정의 이유로 들었던 점은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이야기꾼으로서 지녔던 그의 비상한 재주와 또 캐내도 캐내도 다함이 없는 그의 무한정한 상상력과 풍부한 경험에 대한 인정에 다름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로부터 배운 세상읽기에 대한 재확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이런 상을 받을 시기, 라틴 아메리카에는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비평가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몇몇 중남미 대가들이 있었다. 바로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그는 훗날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와 카를로스 푸엔테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코르타사르, 그리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보다는 아래 세대지만 페루의 바르가스 요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작가들 사이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그야말로 스타중의 스타고, 지금도 그의 명성은 빛바래지 않은 채 여전히 건재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세르반테스를 위시한 그에게 붙여진 수많은 수사적 찬사는 결코 허사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작가적 실력에도 불구하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만큼 비난과 논란의 대상이 되는 작가도 사실 드물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쿠바의 카스트로와 가깝고 그의 행동이 지극히 정치적이고 또 그 성향이 좌익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이분법을 걷어치우고 지금에 와서 그를 평심하게 보면 그는 인간의 실제 삶과 상상력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고 싸운 사람이다. 방금 위에서 언급한 작가들보다 그에게서 더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가 살아온 역정이 아주 인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비극적 비전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서 이제나 저제나 연방정부로부터의 연금을 15년 넘게 기다리며, 그 소식을 갖다줄 우체부를 기다리러 부둣가에 나가는 한 늙은 대령의 기다림과 고독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는 싸움닭을 길러 투계시합에 나가 그의 실력을 마을 사람 모두에게 보여주고자 하지만 그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족장의 가을>은 대통령 궁에 갇힌 그로테스크한 한 독재자의 원형상을 통해 권력의 신비스런 속성을 파헤친다. <불길한 시간>은 출처불명의 전단이 마을에 나돌아다님으로써 서로 죽이고 죽는 사건을 통해서 마을 전체가 파멸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한편 <예고된 죽음의 기록>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마치 복수의 여신들에 쫓기는 오레스테스처럼, 한 사나이의 살인 사건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미로속의 장군>에서는 남미 해방의 영웅 시몬 볼리바르 장군이 죽기 일주일전의 삶을 묘사하면서 권력과 영광, 삶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다.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들은 시종일관 인간의 파멸이나 좌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권태, 소외, 죽음, 고독 등 주로 어둡고 무거운 테마들을 말하고 있다. 또다른 그의 작품들 <낙엽>,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 <순진한 에렌디라와 포악하기 그지없는 할머니에 관한 믿기 어려운 슬픈 이야기> 등은 제목 그 자체로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시사적이다.

바로 이런 초기작들로부터 최근에 발표된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의 소설들을 관통하는 것들은 가을의 이미지, 황혼, 몰락, 낙조의 정조, 그리고 이런 것들과 연결된 고독이다. 그것들은 한마디로 모두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그 모든 것들을 자세히 설명할 공간은 없지만 이들 비극적 이야기들은 인간존재에 대한 끊없는 물음, 나아가 운명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물론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고 그것들은 본질적이고 영속적이라는 보편적인 테마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원형(archetype)적 테마가 가장 총체적으로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백년동안의 고독>이다.

이 소설은 100년간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승리와 또 그 좌절의 대서사시이다. 한마디로 말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들은 그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인공들의 행동양식에서 보여지듯 정신적 편력, 모험의 역사다. 그와 동시에 모든 작품들은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이 그러한 것처럼 하나의 비극적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들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에서 예외없이 발견하는 것은 주인공들에서 보여지는 인간조건의 한 극과 또다른 신적인 대극 사이의 끊임없는 충돌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속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이 양극단의 중간에 위치한 인물들로서 그들은 인간인 동시에 그들의 영웅적인 자세에는 신성의 그림자가 깃들여져 있다. 왜냐하면 모든 주인공들의 투쟁에는 알지 못하는 것(그것이 신의 존재여도 좋고, 불멸이어도 좋고),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에 대한 불굴의 인간정신이 보이기 때문이다.



역설과 진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무엇보다도 모순투성이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는 이 모순 이라는 용어가 내포한 모든 요소들을 아주 좋아하고 즐기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가 언젠가 한 인터뷰의 글을 읽어보면 지금 한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인지 알 수 있다: “언젠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사람은 교조적이고 모든 교조적인 것은 반동적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매번 반어법을 이용해 말합니다. 특히 문학의 재료를 다룰 때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이렇게 매번 모순투성이의 반어법을 쓰지 않게 되거나 내자신을 실수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지 않으면 나의 문학적 창조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우리들은 똑같은 책만을 쓰게되겠지요. 그러니 도리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이런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언어의 사용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 특유의 유머, 풍자, 패러독스가 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좌익 사회주의자에 가깝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경직된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혐오하고 배격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런 도그마적 문학은 선과 악, 흑과 백의 단순 이분법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은 문학적 자유를 제한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작가들의 혁명적 임무는 글을 잘 쓰는데 있고” 이상적인 소설은 “그 소설속에 담긴 정치, 사회적 내용이 아니라 현실속으로 독자들을 침투, 끌어들일 수 있는 힘을 통해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데에 있다.” 이 점은 격동의 동시대를 살았던 한국의 소위 민중작가들로 불렸던, 목청만 있고 노래는 없었던 작가들이 곱씹어볼만한 대목이다. 브라우닝이 말했듯이 남는 것은 시에서 노래한 새가 아니라 바로 작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는 반드시 그의 문학세계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974년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좌익 성향의 주간지를 창간했던 그 해, 그는 멕시코에서 차로 1시간 정도 걸리는 쿠에르나바카(이 도시는 멕시코시티에 사는 중산층의 사람들이 공해를 피하기 위해 주말에 가 쉬는 별장이 많은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에 호화로운 별장 하나를 산다. 그리고는 1년의 반을 멕시코에서 살 것이고, 나머지 반은 콜롬비아에 살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의 집이 더 늘었기 때문이다(현재 그의 집은 멕시코, 콜롬비아, 바르셀로나 등을 포함해 4채이다. 그는 고급 주택가가 즐비한 멕시코의 산 앙헬에 위치한 호화저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로물로 가예고스 상으로 받은 상금을 베네수웰라의 좌익 게릴라 단체에 헌금하기도 하지만, 유명해진 지금, 인터뷰나 초청강연에 터무니없는 돈의 액수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미국문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열렬히 옹호하고 있다. 한편, 그는 20세기 최고의 작가는 미국에서 나올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고 현대의 문화를 논할 때, 미국의 문화를 도외시하고는 성립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그의 이런 관점은 1950년 중반 그가 파리에서 보았던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문화에 대한 그의 혐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이성의 감옥, 추상성의 세계에 대한 그의 반발이었고 사르트르와 카뮈로 대변되는 실존주의 시대에 대한 그의 거부감이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얼마나 이중적이고 어떤 때에는 모순적인지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가 가진 이런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작가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비록 작가이기는 하지만 나 역시 유용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무기를 다룰줄 모른다. 우리들은 지금 무기를 들고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고 너무나도 많은 불필요한 순교자를 가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혁명적인 작가의 최대임무는 바로 글을 잘 쓰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작가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점을 그가 인식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라틴 아메리카에 관한 그의 정치적인 입장은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라 단호하고 명료하다. 그는 자신의 이런 행동으로 인해 칭찬도 받기는 하지만 불필요한 비난이나 욕도 많이 들어먹는다. 1982년 스톡홀름에 가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귀국길에 쿠바에 들려 그의 절친한 친구 카스트로를 만난 것은 하나의 역설이고, 상징이다.

카스트로, 쿠바를 생각하며, 얼마전 작고한 옥타비오 파스를 떠올린다. 파스 역시 카스트로가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체제에서 표명된 혁명이상에는 공감했지만  그는 쿠바혁명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한 혁명”으로 규정하면서 이내 그 이상을 버리고, 살아 생전, 쿠바를 한번도 방문하지 않는다. 파스는, 쿠바인들은 이전 바티스타 정권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카스트로 체제안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치적 면에서 보자면 파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물과 기름과 같은 사이이다. 그런데 이 두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멕시코시티의 한 지역, 지척거리에 서로 살고 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관계도 흥미로운 부분의 하나이다. 바르가스 요사 역시 쿠바 혁명에 심정적으로 동조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종종 그의 친구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쿠바에 대해 보여주는 무조건적인 호의를 비판하고 나선다. 그런 그가 어떤 성향을 띄었든 페루의 대통령 선거에 띄어든 예에서 보듯이 그가 얼마나 지금 정치적으로 놀고, 이렇다할 작품활동이 없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1971년 쿠바의 젊은 시인 에베르토 파디야 사건은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들을 양분시키는 말많은 사건이었다. 쿠바의 새로운 새대의 기수였던 파디야는 쿠바 정부의 경직된 예술정책과 억압체제에 항의하는 시를 썼다가 쿠바정부에 의해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는 체제전복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가 결국에 가서는 미국으로 추방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 파디야는 “자기 죄에 대한 고백”과 “자기반성”의 성명글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바로 중남미, 더 나아가서는 사르트르나 카뮤와 같은 세계 지성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빚게 된다. 이미 예견했던 바지만 옥타비오 파스는 에베르토 파디야 사건을 쿠바 전체주의의 도덕적 결함을 보여주는 징조로 보았고, 바르가스 요사 역시 이제까지 일정하게 관계를 유지했던 쿠바 정부와 완전히 손을 끊게 되었다. 이런 상황 앞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코르타사르 역시 당황했지만 그들은 이 사건이 쿠바 내부의 정치적  분파주의에서 기인한 하나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면서 카스트로를 옹호하게 된다.

한세기를 마무리하는 지금, 아니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지금에 있어 좌니 우니, 현실이니 참여니 하는 이분법적 논쟁이나 구분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는 여기서 언급할 필요가 없다. 평심하게 생각해 볼 때,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카스트로와 가까운 이유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나 쿠바의 정치체제에 대한 공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인간적인 매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이 점이 나는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카스트로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있어서는 키크고 구렛나루 턱수염에 군복을 입은 잘 생긴 카스트로가 더없는 친구로 생각될 것이고, 로맨티스트이자 독서광이었던 카스트로에게는 그가 못다한 꿈을 콜롬비아의 친구에게서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2년전 멕시코에 갔다가 우연히 책방에서 만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모습은 필자에게 하나의 도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제 칠십이 넘은 백발이 성성한 그의 모습은 그의 단편인 「성녀」에 나오는 주인공 두아르테, 죽은 딸의 시체를 바티칸 교황청으로부터 시성받기 위해 수십년간 싸우고 있는, 그러나 그의 이런 희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두아르테, 그가 바로 가르시아 마르케스일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스가 그렇고 보르헤스가 그렇듯이 아름답게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진인(眞人)의 모습으로 다가온 그 앞에 지금까지 우리들이 그에 관해 벌였던 논쟁이나 허사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를 그때 깨달았던 것이다.



미메시스


보르헤스가 가고 옥타비오 파스가 없는 지금,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아마도 카를로스 푸엔테스와 더불어 현존하는 라틴 아메리카 최고의 작가,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 그가 구사했던 혁신적 기법이나 새로운 글쓰기의 시도에서 보듯 그는 현대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그는 라틴 아메리카인의 아이덴티티 문제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작가로서도 유명하다. 1957년 그가 쓴 최초의 소설인 <낙엽>에서 그의 대작인 <백년동안의 고독>, 그리고 최근의 <12개의 순례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주제는 바로 라틴 아메리카인의 정체성 탐구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가 남긴 무수한 작품들은 바로 이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한 작가의 고통스런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정점에 <백년동안의 고독>이 있다.

사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인간의 행복과 역사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일찍 깨달은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자신과의 투쟁에서는 시가 탄생하고, 타자와의 논쟁에서는 정치가 탄생한다는 예이츠의 말은 아마도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가장 어울리는 말일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실상 살아오면서 이 두가지 점을 하나로 아우르고 또 그것의 해답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싸워왔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고대 아메리카의 신화세계에 침잠하기도 하고, 쿠바 혁명에서 보여준 새로운 이상사회를 희구하기도 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와 이웃 나라 미국의 부단한 내정간섭을 비난한다. 한편 자신의 조국인 콜롬비아의 지진을 취재하러 노인네 몸으로 현장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서 현실은 미메시스다. 아마도 그에게 글을 쓰는 작업은 현실의 반영이고 동시에 상상력의 투영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의 모습을 비추기도 하지만 이 세계, 또다른 타자의 모습을 비춘다는 데에 있다.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회 또는 시간이라는 괴물속에 갇혀진 존재라고 본다. 물론 거기서 탈출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에게서 보다 시급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우리들이 바라는 세계사이의 거리감, 그 모순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가 살고 보는 세계는 「백년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멜키아데스가 예언한 “유리와 빛나는 집들”로 이루어진 투명하고 맑은 사회는 결코 아니다. 그곳은 오염되고 부패하고 빈곤과 폭력이 난무한, 모든 것이 뒤틀린 혼돈된 사회다. 빈곤은 사람들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냉혹하고 잔인하게 만든다. 이런 세계에서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개인의 윤리와 사회적 윤리의 합치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문맹과 굶어죽는 사람이 엄존하는 상황에서는 진보나 진정한 근대성은 구현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또 민주주의와 사회정의가 수반되지 않은 경제발전 또한 의미없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볼 때, 그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우리들이 진보의 환상에 사로잡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잃게될 때 어떤 식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끊없는 경고일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정체성 추구는 어떤 때는 개인적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집단적이기도 하다. 또 어떤 때에는 과거지향적이고 또 어떤 때에는 유토피아적이다. 그리고 그가 마주치는 현실과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세계사이에 화합할 수 없는 괴리가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한편, 지성인으로 그의 행동은 분명 모더니티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소설가로서의 그가 구사하는 문장이나 세계관은 대단히 포스트모던적이다. 그러나 그에게서 보이는 이런 역설적 모습은 사실 그만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고 중남미의 특수한 역사적, 문화적인 상황 그리고 민족적인 아이덴티티와 근대성을 추구하고자 하는데서 오는 한 지식인의 내적 긴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개인적인 모순에서도 그가 현실과 상상력의 메워질 수 없는 간극에서 투쟁하고 편력하는 것, 그 속에서의 인간적인 성취와 한계가 바로 그가 우리들에게 보다 매력적이고 좀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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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출간된 마르케스의 책들(원작 발표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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