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낳았는데도 연탄화덕을 설치해 주는데 아들이었으면 어쨌을까……." 아버지의 대답은 명료했다.
"얼라가 머시매도 아니고 가시낸데, 밥한다고 불 때면 연기 날 거고, 눈이 매워서 얼라 때부터 자주 울면 성질 더러워지는 건 자명한 이치, 가시나가 성질 더러우면 시집이나 가겠나." 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남매 중에서 그 누나가 제일 성질 더럽다.)
38년 전 일이다. 당시 아버지는 서울서 생활을 하시느라 집에는 몇 달에 한 번씩 오셨다.
당시로서는 목돈인 40만환을 엄마께 체신환으로 보내주셨다.
마침 그 날이 장날인지라 엄마는 그 돈을 들고 시장과 집을 반복하며 신이 났으나,
1만환을 채 사용하기 전에 나머지를 몽땅 잃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아주 큰돈인지라 여간 상심이 크지 않았다.
고심 끝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지만 외근중이라 사정을 전해달라고 부탁만 해두었다.
상심에 빠진 엄마는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밤차를 타고 그 맘쯤 도착하셨다. 대뜸 80만환을 내놓으시며 엄마를 포함해서 남매들 옷 한 벌씩 해 입으라 하시곤 오전에 서울로 올라가셨다. 훗날 아버지께 듣기로 여자 간에 큰돈을 잃어버렸으니 두고두고 마음 상할 터, 차라리 횡재한 기억을 남겨주기 위해 무리를 해서 구한 돈이라고 하셨다.
그날 새벽녘에 잠시 들리신 게 내 동생 창구의 출생 원인이 됐단다.
엄마와 격의 없이 친했던 탓에 남매 중에서 창구의 출생 내력은 나만 알고 있다.
창구는 자라면서 다른 아이에 비해 발육이 늦었다.
다운증후군이라 했다. 서른여덟 살 된 지금도 말을 못 한다.
창구가 다섯 살 때 처음으로 한 소리는 엄마 아빠가 아니라 나를 쳐다보며 "알투" 라고 부른 것이었다. 우연히 한번 그렇게 부른 게 아니라 이후로 나만 보면“알투” 라고 했다.
그 경이로움에 우리 집에서 내 이름은 없어지고 나는 알투로 불리게 되었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우리 집에서 나는 철저히 알투로 불린다.
심지어는 딸아이조차 아빠 대신에 알투라고 부른다.
어릴 때, 숙제한다고 엎드려 연필심에 침 바르고 있으면 숙제는 안 해도 되니 나가서 놀라고 하셨다.
하루는 아버지께 원망 섞인 투로 숙제 안 해간 벌로 손등 맞은 얘길 했다.
또 숙제 내주더냐고 물으시곤 공책을 가져오라 하셨다.
공책에 뭐라고 적어 주시며 만일 또 숙제 안 해 왔다고 때리려 하면 그것을 보여주라고 하셨다.
숙제검사 시간에 아버지가 적어 주신 것을 선생님께 보여드린 후, 나는 한 번도 숙제를 해 간 적이 없지만 체벌을 받지 않았다.
아버지가 공책에 써주신 말은 한 문장이었다.
"이 아이에게 숙제를 내 주지 마시오, 삼매 아버지 허만상"
당시 통지표에는 가정 통신란이라 하여 교사와 학부모가 간단한 메모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학업성적은 우수하나 단체생활에 문제가 있음." 이라는 선생님의 메시지 옆에 아버지는 "담임선생님이 아이를 잘못 파악하고 있음." 이라고 적으셨다.아버지는 우리 남매 뿐 아니라 이웃의 또래들이 아프다고 해도 불러오게 하여 동전을 한 움큼씩 쥐어주곤 하셨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연유를 물어 보니 애들 아프다는 게 별게 있나, 감기나 배앓이 정도가 태반인데 동전이 한 움큼 있으면 나가서 빨리 쓰고 싶은 마음이 병을 몰아내는 활력이 아니겠냐고 하셨다.
1985년, 서슬 시퍼런 5공 시절 훈련소를 거쳐서 막 부대에 배치 받았을 때 2.12총선이 있었다. 군에서는 비밀 투표란 없었다. 부대장이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1번을 찍으라고 했다.
달리 마음에 둔 후보는 없었지만 강압이 싫어서 그 옆 칸을 꾹 찍어 버렸다.
즉석에서 심하게 구타 당하고 헌병대로 넘겨져서 일주일간 영창을 살고 나왔다.
영창 살 때 맞은 후유증으로 허리를 다쳤다. 동향 선배가 휴가 나가서 그 사실을 우리집에 알렸다.
그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사위를 포함한 "내 새끼들 집합" 을 명해서 가족들을 모조리 데리고 면회를 오셨다.
아버지는 부대장을 협박하여 내 새끼 치료는 내가 직접 시킨다며 보름간 위로휴가를 받아냈다.
그 날이 1985년 3월10일 내 생일이었다.
"올해부터 니들 엄마와 나는 오늘을 합동생일로 하기로 했다" 고 하셨다. 그날 이후로 부모님과 나는 3월10일이 생일이 되었다.
노년이 되자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특별히 당부 하셨다.
"내 죽고나면 제사 아무 소용없다. 그 보다는 말 못하는 창구를 나 대하듯이 하면 귀신이 돼서라도 니들에게 절하마.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음식은 전통방식을 무시해라. 제사음식이 유래될 당시로서는 최고의 재료이며 조리법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니들이 좋아 하는 음식으로 해라. 소고기국 벌겋게 끓이고 회도 사서 니들끼리 맛있게 나눠 먹으며 의좋게 지내면, 절 같은 건 안 해도 흡족한 제사상 받은 걸로 하마"
오늘은 아버지 기일,
주방 경력 수십 년의 형수들과 누나들이 들어선 한 구석에서, 나는 고추가 있긴 있냐는 형수들의 놀림을 무시하고 콩나물 발을 따고, 부침개를 뒤집는다.
그러나 정작 내가 주무르고 있은 것은 콩나물이나 프라이팬이 아니다.
지나온 아버지와의 추억, 그 조각들을 주무르고 있었다.
亞然堂金海許公萬相神位라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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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눈팅삼매님께서 2007년 8월 24일에 본인의 블로그에 발표하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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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지... 언제나 겉으로만 맴돌다 끝내 속 깊은 얘기는 서로가 하질 못했죠.
2007/11/05 23:32산매님의 아버님은 멋쟁이 신사이셨군요.
잘 읽고 갑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애저녁에 버려야 할 듯 하군요.(저 말입니다~~~)
삼매님한테 산매님이라고 하시면.. 사빕이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ㅎㅎㅎ
2007/11/05 23:42삼매님 아버님은 마음이 크신 분이시군요.
2007/11/06 05:14삼매님도 마음이 무척 크신 분이랍니다.
2007/11/06 11:23